조선을 흔든 개혁의 바람 – 조광조 평전

조광조 평전
조선을 흔든 개혁의 바람 – 조광조 평전
1510년 29세 (4)
  • 입력 : 2021. 07.12(월) 17:17
  • 양희진 기자
하지만 세상일과 동떨어진 선비로만 지내기엔, 그저 구도의 기쁨으로만 살아가기엔 그에게는 온전히 충족되지 않는 빈 자리가 있었을 것이다. 그 자리를 냉소적인 웃음으로 채우며 살기엔 그의 가슴은 너무 뜨거웠으리라.
그렇다면 남은 것은 수기를 넘어선 치인治人, 자신이 배운 바를 세상에 적용해야 할 책무다. 정치라고 해도 좋겠고 사회운동이라 부를 수도 있겠는데, 조광조의 시대라면 후자는 아직 기대하기 어려운 때이니 그에게 남은 선택은 조정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그런데 또 묘한 것이 조선의 정치계는 현재의 정치·언론 등의 역할을 모두 맡고 있었으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조광조의 선택지 –물론 임명권을 가진 임금의 선택지-는 생각보다 제법 다양했을 것이다.
스물아홉까지 공부만 했다. 재능도 출중했다. 어느 정도는 칭송의 예로 말한 것이겠으나, 당대의 평을 보자면 “진실로 세상에 드문 현재賢才로서 우리 동방에 그를 필적할 사람이 없었다”라고 하니 그 자질을 짐작할 만하다. 이런 인물이 차곡차곡 안으로만 채워 넣고 있었다. 그 학문을 언제 겉으로 드러내려 함일까. 다른 이들의 속도를 신경 쓰지 않는 이였으니 그 시기 또한 자신의 판단에 따랐던 것이다.

그의 봄이 생각보다 늦어졌던 까닭은 그의 마음먹기뿐 아니라 외부적인 상황 때문이기도 했다. 조광조의 이름이 처음으로 실록에 오른 사건을 보면 정말 그렇다. 흥미롭게도 그 사건은 모모某某한 학문이나 과거 급제 같은, 우리가 예상하는 범주의 것은 아니다. 그의 이름은 나이 스물여섯인 중종 2년(1507년), 한 역모 사건에 관련된 것으로 처음 등장한다. 이해 윤閏2월에 있었던, 김공저金公著와 조광보趙廣輔 등이 정국공신인 박원종朴元宗·유자광을 처단하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고자 했다는 ‘김공저·조광보 옥사’였다. 이 사건에 절친한 조광좌趙廣佐가 연루됨으로 인해 조광조 또한 애매하게 걸쳐진 것이다. 하지만 조광조는 한 차례 조시를 받은 후 무혐의 처리되어 바로 방면되었다.
이런 정치적인 옥사에서 즉각 방면된 것을 보면 그는 이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었던 게 분면하다. 이 사건의 눈길을 끄는 이유는, 조광조의 연루 여부가 아니라 그런 사건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역모 사건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반년 후인 중종 2년 8월에는 ‘이과李顆의 옥사’가, 중종 3년 11월에는 ‘신복의辛服義의 옥사’가 있었다. 다음 해인 중종 4년 10원에는 종친들이 중심이 된 ‘이석손李錫孫의 옥사’가 이어졌고, 다시 몇 해 뒤인 중종 8년10월에는 정국공신 당사자인 박영문朴永文·신윤무辛允武의 옥사‘까지 있었다.
양희진 기자 hoahn01@hanmail.net